2010년 2월 2일 화요일

농구 상식 : 윌트 챔벌레인

윌트 챔벌레인(Wilt Chamberlain)
2 m 16cm / 125kg
캔사스대 3년 중퇴
1936/ 8/ 21

득점기계 윌트 체임벌린은 마이클 조던과 함께 NBA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 그의 본명은 윌튼 노먼 체임 벌린이며 '윌트 더 스틸트' '더 빅 디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62년 뉴욕 닉스전에서 세운 한경기 100득점이란 전인미답의 대기록과 한 경기 최고 55리바운드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모두 그에 의해 달성되었다. 100점,78점,73점,72점등 한경기 최다 득점 랭킹 1∼4위는 모두 그의 것이요, NBA13년 경력을 통틀어 NBA 통산 총득점2위(1위는 압둘 자바)와 총리바운드 1위에 올라있다.

월트 체임벌린 때문에 3초룰이 변경된 적도 있고 경기중 르블렛이란 선수는 체임벌린에게 맞아 기절한적도 있고 점프를 하면 백보드 상당을 가볍게 터리할 수 있는 신체 및 운동 능력을 겸비했지만 경기는 기술을 쓰기를 좋아하는 젠틀한 선수 였다고 전해집니다.

윌트 체임벌린이 NBA사에 신화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과 운동신경 덕분이었다. 216cm의 당시 센터로서는 최고의 신장을 자랑하는 거구이면서도 스피드와 탄력까지 갖춘 그는 골프 와 풋볼,테니스,복싱에도 재능을 보일만큼 스포츠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년시절엔 4살땐 폐렴에 걸려 거의 죽을 뻔 하기도 했고, 십대때엔 뇌염으로 다리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데다, 용접일을 하던 아버지밑에 10여명의 형제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했다.

체임벌린은 필라델피아 오버브룩 고교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뒤 농구명문 캔자스대학을 거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당시 팀명은 워리어스)에 입단했다. 지역방어가 허용되는 대학경기에서는 마음먹은 만큼 득점이 쉽지 않아 NBA조기 진출을 마음먹고 캔사스대학 3년을 중퇴하고 NBA에 진출, 입단 첫해 부터 NBA 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MVP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며 화련한 NBA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후 7년연속(60~66년) 득점왕, 14 년간의 현역생활 중 11번의 리바운드왕을 차지하며 4차례 MVP에 뽑혔던 그는 NBA 최고의 공격형 센터로 평가받으며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우승복은 없는 편이어서 플레이오프에는 13번 진출했지만 라이벌 빌 러셀이 버틴 보스턴에 번번이 패해 우승은 단 2번에 그쳤고,정규리그 MVP상은 4 번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 MVP는 단 한번에 그쳤다.

그는 운동신경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좋아서 독학 으로 스페인어,불어,독일어,이탈리어를 깨우치기도 했고,클래식,로큰롤 등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올드무비를 즐겨 보는 영화광이기도 했다.

체임벌린이 농구를 한 시절은 현대의 농구 전술이 발전하기 전으로 저질 슛의 남발등으로 리바운드를 잡을 기회가 많았으며 이런 부분을 반영하면 로드맨 보다 리바운드 잡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음.

체임벌린은 99년 10월13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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